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-스웨덴 관계 (문단 편집) === 20세기 이전 === [[중세]] 초 [[키예프 루스]]는 [[흑해]]에서 [[북해]]에 이르는 하천 무역을 통해서 [[스칸디나비아 반도]]와 [[동로마 제국]] 및 [[아바스 왕조|압바스 칼리프조]] 사이를 연결하며 번영을 누렸다. 러시아와 스웨덴은 [[노브고로드 공국]], [[모스크바 대공국]] 시절부터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다. 15세기 이전 양국 사이의 전쟁은 국지전 성격이 강했더라면 16~17세기부터 스웨덴과 [[루스 차르국]] 양국은 [[리보니아]][* 오늘날의 [[에스토니아]] 남부와 [[라트비아]] 북부 비제메 지역] 및 [[라도가 호수]] 일대를 두고 적극적으로 패권을 다투게 되었다. 1557년, [[스웨덴 국왕]] [[구스타브 1세 바사]]는 [[이반 4세]]의 루스 차르국과 [[벨리키 노브고로드|노브고로드]]에서 강화조약을 맺었으나, 이반 4세 사후 루스 차르국에 [[혼란 시대]]가 이어지고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에서 [[모스크바]]를 점령하자 여기에 자극을 받아 스웨덴도 잠시나마 노브고로드를 점령하였다.[*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스웨덴도 [[구스타브 2세 아돌프]]의 동생 칼 필리프 왕자를 루스 차르국의 [[차르]]로 옹립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[[미하일 1세|미하일 로마노프]]가 선출되면서 백지화되었다.] [[구스타브 2세 아돌프]] 치세에 신흥 강국으로 거듭난 스웨덴은 1617년, [[미하일 1세]]와 스톨보바 조약을 체결하여 [[잉그리아|잉에르만란드]](Ingermanland)를 빼앗아 [[러시아인]]이 [[발트해]]로 나오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는 방면 [[핀란드]]와 [[에스토니아]]를 육지로 연결하는데 성공하여 발트해 동부에서 [[스웨덴 제국|막강한 세력]]을 과시하였다. 이후 루스 차르국은 발트해 진출을 위해 애썼고 [[알렉세이 1세]]는 [[칼 10세 구스타브]]가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, [[덴마크-노르웨이|덴마크]]와 연달아 싸우는 동안 뇌테보리[* 현재 러시아 [[실리셀부르크]](Шлиссельбург).]와 리보니아를 침공하기도 했으나 결국 격퇴당했다. 18세기 초반까지 러시아는 철, 구리, 주석, 무기를 스웨덴으로부터 수입해와야 하는 처지로 스웨덴이 군수 물자를 러시아에 수출하는 입장에서 러시아가 스웨덴을 압도하기 어려웠었다. 심지어 [[러시아 제국군|러시아군]]은 숫자만 앞섰을 뿐 편제나 전술도 구식이어서 [[대북방전쟁]] 초창기에는 최신 전술을 구사하고 고도로 훈련된 [[스웨덴군]]을 상대로 졸전을 면치 못했다. 그러나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 내에서 야금술과 제철업이 발전한 것을 계기로 무기 개발과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한 [[표트르 대제]]는 스웨덴의 편제와 전술을 카피하여 [[칼 12세]]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. 1708년 9월, 칼 12세는 러시아 제국에 충성하던 [[코사크]] 지도자 [[이반 마제파]]와 밀약을 맺고 모스크바 침공을 위해 [[우크라이나]] 일대로 진격하였다. 그러나 이반 마제파가 칼 12세와의 밀약이 발각되면서 마제파의 코사크 군대는 본격적으로 스웨덴군을 돕기도 전에 쓸려나갔고, 스웨덴군은 [[폴타바 전투]]에서 대패하면서 칼 12세와 이반 마제파는 [[오스만 제국]]으로 망명하였다. 스웨덴군을 궤멸시킨 표트르 대제는 여세를 몰아 [[카리알라]]의 [[비보르크|비보리]], 에스토니아의 [[탈린|레발]], 리보니아의 [[리가]]까지 석권하였고 [[발트함대]]를 창설하여 스웨덴과 핀란드 해안가를 초토화시켰다. 칼 12세는 [[노르웨이]] 침공 도중 전사하였고 스웨덴 왕위 계승 분쟁 끝에 왕위를 물려받은 여동생 [[울리카 엘레오노라]]의 남편 [[프레드리크 1세]]가 1721년에 뉘스타드[* 현재 핀란드 [[우시카우풍키]](Uusikaupunki).] 조약을 체결하여 루스 차르국은 카리알라, 에스토니아, 리보니아, 잉에르만란드 등 발트해 연안 지역을 석권하였다.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며 러시아 의회로부터 '대제(Великий)' 칭호를 받았고 [[러시아 제국]]을 선포하여 열강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반면, 발트해 패권을 지키지 못한 스웨덴은 2등국으로 전락하였다. 이후 스웨덴은 실지를 되찾기 위해 1741년, 1788년 두 차례 전쟁을 다시 일으켰지만 1741년에는 쪽도 못쓰고 발리면서 오히려 퀴미 강 동쪽의 [[사이마 호]]에 이르는 영토를 추가로 할양했고 1788년~1790년 [[구스타브 3세]]가 일으켰던 전쟁은 [[피로스의 승리]]로 끝나며 실익을 얻지 못했다. 그리고 후자에서 비보르크만 해전으로 함대 대부분을 잃은 스웨덴은 [[나폴레옹 전쟁]] 중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|나폴레옹]]의 암묵적 동의를 얻은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1809년, 프레드릭스함[* 현재 핀란드 [[하미나(핀란드)|하미나]](Hamina).] 조약으로 핀란드 전역을 러시아에 할양하였다. 그리고 [[알렉산드르 1세]]는 [[핀란드 대공국]]이란 [[괴뢰국]]을 창설하여 러시아 황제가 지배하는 자치국을 선언하면서 스웨덴과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할 일은 사라졌다. 스웨덴과 러시아의 전쟁 와중에서 [[라도가 호]] 일대의 여러 민족들은 토속신앙에서 [[러시아 정교회|정교회]]로 개종되었다가 다시 [[개신교]]로 개종하다가 정교회로 환원되는 등 복잡다단한 역사를 겪었다. 한 때 잉에르만란드를 장악한 스웨덴은 해당 지역에 [[루터교회]]를 믿는 [[핀인]]들을 정착시켰는데 이들은 [[잉그리아 핀인]]의 기원이 되었다. 이 외에도 대북방전쟁 당시 포로로 잡힌 [[스웨덴인]] 상당수는 시베리아의 [[토볼스크]] 등으로 강제이주당했는데, 이러한 연유로 [[시베리아]]의 주요 도시들[* [[토볼스크]]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이후로 중요성이 감소했고, [[옴스크]]와 [[크라스노야르스크]], [[이르쿠츠크]] 등등] 스웨덴 문화 유산 등등이 적잖이 남아있는 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